🌊 시간

2024. 12. 31.

🌊 시간

이 메일이 잘 안보이시나요?

어떻게든 되겠지

요즘 정병연은

시간이야말로 인간관계를 이루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다른 모든 요소들이 한결같이 ‘이 관계는 당신에게 이롭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내더라도 그간 쌓아온 시간이 충분히 많다면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결정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게 유일한 근거일지라도. 카드게임으로 비유하면 조커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정반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엮어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다양한 루트로 관계를 일군 내 자신이 산증인이다. 소위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표방하는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코로나 덕분에(?)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필드 또한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취향이나 관심사가 통하거나 같은 업계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즐거웠다. ‘아’ 하면 ‘어’가 나왔으니까. 부연설명은 생략, 시너지가 뭔지 느꼈으니까. 서로 다르더라도 낯선 것을 접하는 데 거리낌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뻤다. 무언가 알려주면 눈을 빛내며 들어줘서 내가 쌓아온 경험들이 나름 유의미했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넓음을 체감했으니까.
그러는 사이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은 계속해서 줄었다. 서울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나와 달리 대부분 나고 자란 곳 인근에 자리를 잡았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많아야 1년에 두어 번 보는 게 전부지만 괜찮았다. 오랜만에 만나면 근황 좀 나눈 다음엔 했던 얘기 또 하고 옛날 얘기 또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재밌었다. ‘너도 참 여전하다’와 ‘우리도 나이를 먹긴 먹었네’ 사이를 오가는 대화가 좋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미묘하게 어긋나는 싱크로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취향, 관심사, 하는 일 등은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 혹은 가치 판단 등이 다르니 듣고도 모른 채 하고 하려던 말을 삼키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예전이라고 그런 것들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단지 그런 것들이 잘 맞는 사람들을 골라서 만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스무 살 때나 하던 고민을 서른 살이 넘은 지금 또 할 줄이야. 이미 과거가 돼 버린 어느 시기에 맺은 관계가 현재의 나에 맞게 업데이트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놓아버릴까? 그렇다면 현재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또한 언젠가는 그와 같은 처지가 될 텐데,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놓아버리면 되는가? 그럼 내 인생의 끝에는 어떤 사람들이 옆에 있어줄 것인가? 인간관계는…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친구와의 우정에 죽고 사는 중고딩도 아니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도 아니고 사회 생활 할 만큼 해본 사람이 뭘 그런 걸로 고민하는지. 대충 맞춰주고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관리하면 되는 거지. 경조사 때 연락하는 게 민망하지 않을 만큼만.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왜 혼자 오버할까. 글쎄. 가만 생각해보면 한 번씩 이런 오버를 하는 타이밍이 오는 듯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오겠지.
이번 타이밍에 내린 결론은 앞서 말했듯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요소가 나쁘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쌓아온 시간은 다른 어떤 관계에서도 갖지 못한 특별한 요소다. 그 자체로 그 관계의 단단한 증거임은 물론 앞으로 닥칠 변화에도 대응할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한때의 삶을 나누어 가진 ‘우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많이 나눠가질수록 더 영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폭설과 강추위가 다녀간 뒤에도 떨어지지 않은 잎들이 꽤 많다.

지난 레터 이후에

<오징어게임>에 대한 글 두 편을 올렸습니다. 하나는 시즌1을 보고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시즌2를 보고 쓴 글입니다. 최근에 시즌2가 공개됐죠. 다 보고 나니 글을 쓰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시즌1을 보고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더라고요. 아카이브 차원에서 올렸고 다음 날엔 시즌2를 보고 쓴 글을 올렸습니다.

드라마에는 게임 지속 여부를 가리는 찬반 투표에서 과반 달성을 위해 참가자들이 벌이는 소란이 점점 격렬해지는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편까지 보고 난 뒤에 뉴스를 틀었더니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국민의힘 의원들이 "직권 남용"이라 외치며 의장석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즌1만큼은 아니지만 시즌2 역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쉬움이 남지만 이것은 '속편'이라는 정체성에 내재된 아쉬움입니다. 게다가 애초부터 3개 시즌을 염두에 뒀다는 감독의 인터뷰로 미뤄보아 결국 최종장에 해당하는 시즌3를 봐야 이 시리즈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굳이 시즌2와 3을 나눠야 했을까?).

매번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면 역설적으로 당신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된다. 1년 단위로 목표를 잡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에 1년이면 넉넉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1월에는 12월이 한참 멀게 느껴지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실행하고 성과를 내는 일은 기본적으로, 지금 당장, 매일, 매주 할 수 있다.

- 썸원, 당신의 새해 계획이 매번 처참하게 실패하는 이유(브라이언 P.모런, <위대한 12주> 중에서)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신나게 그러모았습니다.

라고 하기엔 조금 덜 모았네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무언가 읽는 데에 좀처럼 시간을 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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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역시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완독한 것은 없고 전체적으로 조금씩 진도를 뺐습니다.

크리스 밀러의 <칩워>는 계속 읽고 있습니다. 소니를 창업한 모리타 아키오 회장이 등장하는 단락이었는데요.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에 힘을 실어줬다는 점, 그런데 일본이 생각보다 너무 잘 해내서 오히려 미국을 위협하기도 했다는 점,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찍어누르기 위해 애썼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대만, 싱가포르, 한국 등이 반도체 산업에 편입되는 배경이 됐다는 점 등이 재밌게 읽힙니다. 대중서인 만큼 세부적인 사항을 생략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요. 어차피 저는 이해 못했을 부분이니 상관없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반도체 기사들이 좀 다르게 읽힐 것 같다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는 현재 8장까지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바에 의하면 저자들이 주장하는 메시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테크놀로지에 내재된 방향성은 없다. 방향성은 테크놀로지 밖에서 선택된다.
선택은 자의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선택을 만드는 환경이 있을 뿐이다.

8장에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적용에 있어 미국과 독일(+일본, 일부 북유럽 국가)은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그 배경과 결과를 보여줍니다. 책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였습니다. 다만 ‘공유된 번영’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조건(ex. 길항 권력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각기 다른 환경(ex. 현재 한국 상황)에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은 어떻게 짜야 하는 건지 조금 모호합니다(책이 아닌 현재 저의 이해도가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핵심 메시지 하나를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논증해나가면서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풀어낸다는 게 놀랍습니다. 저 같은 문외한도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게 설계해둬서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 클라쓰…하면서도 이 책을 만든 편집자 또한 보통 내공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도 읽고 있습니다. 유대교 파트를 지나 기독교 파트로 넘어가니 한결 수월하게 읽히네요. 여전히 익숙치 않은 이름과 성경 구절은 읽는 속도를 높이는 데 방해 요소로 작동하지만 옛날 얘기 읽는 듯한 재미가 쏠쏠합니다. 독서모임 멤버들과 이 책으로 어떻게 대화를 해볼지 즉흥적으로 얘기를 나눴었는데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준비해보려고요.

송구하지만 니콜 펄러스의 <인류의 종말은 사이버로부터 온다>는 진도를 빼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종이책은 각 잡고 자리를 펴서 읽어야 해서…

파올로 휴이트의 <게팅 하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Stand by Me를 추천합니다. 오아시스를 대표하는 앨범은 1집 <Definitely Maybe>와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인데요. 홍대병에 걸린 시절이라 ‘그렇다면 나는 3집을 좋아해보겠다’며 들었던 곡입니다. 그런데 “일본, 한국 등 아시아권에서 인기가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 하면 심심찮게 이 곡을 꼽기도 한다(나무위키).”고 하네요. 역시 저는 그래봤자 대중일 뿐인가봅니다.

제주항공 참사로 희생된 분들과 유가족 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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