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모님 집에 걸 커튼을 찾아다녔다. 두 분은 지난 여름 아파트를 한 채 구입했다. 30년이 조금 넘은 아파트로 6천만원 쯤 줬고 리모델링에 몇 천만원을 더 썼다고 한다. 엄마는 “벽이랑 기둥만 산 셈”이니“우리(=내) 마음대로 고쳐볼 생각”이라면서 웃었다. 추석 직전에 잔금을 치렀고 추석 직후에 리모델링을 시작했으며 지난 달 말에 입주했다. 바로 그 집에 걸 커튼을 찾아다녔다.
   
   
2. 전반적으로 톤다운된 화이트, 네이비, 그린으로 맞춰진 집이다. 거실에는 옐로우나 오렌지로 색감을 좀 넣어주고 서재에는 원목 가구와 어울리는 브라운으로. 안방은 짙은 그린을 골랐다. 퀸 사이즈 침대가 두 개(…)인데다 침구류가 워낙 화려해서 굳이 커튼까지 튈 필요가 없었다. 단 두 번 가본 기억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어울릴지 걱정되지만 정작 두 분은 괜찮댄다.
   
   
3. 이 집은 부모님이 처음 산(buy) 집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live) 집일 것이다. 지금껏 거쳐온 집 중 가장 넓고 무엇보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가장 집다운 집이다. 게다가 각종 디테일을 손수 골라서 그대로 수리해서 들어갔으니 거주 기간에 비해 애정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집 곳곳에서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을 커튼 고르는 일을 전적으로 맡기다니! 아들을 믿으시는군요.
   
   
4.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으니 전자레인지 얘기가 나왔다. 와. 전자레인지.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엔 전자레인지가 없었다. 뭔가 데워야 할 때는 밥솥에 넣었다 꺼내먹곤 했다(군데군데 밥알이 붙은 피자를 드셔보셨는지?). 자취 10년이 넘어가는 내겐 전자레인지의 존재는 너무 당연했고 한편으로 부모님 집에 전자레인지가 없다는 것도 너무 당연해서 짚을 생각도 못했다.
   
   
5. "없는 채로 살아도 충분히 살 만하다."
   “그렇구나."
   
   
6. 그렇구나? 그렇게 쉽게 넘어가면 이렇게 된다. 없는 채로 살아도 충분히 살 만하겠지만 있으면 더 잘 살 수 있다. 일상적으로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는 나만 봐도 알 만하다. 왜 부모님에 대해서는 똑같이 적용하지 않았을까? ‘필요가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없는 채로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서서히 잊어버렸다. 그러면 안 된다. 이제 업데이트는 자식의 몫인데.
   
   
7. 커튼도 비슷했다. “네가 안목이 있잖니”라며 맡겼지만 정작 커튼을 고르며 이야기 나누다보니 인터넷 주문이 번거롭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놀랍게도 해당 지역에는 커튼을 다양하게 보고 고를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 없어졌다. 많은 지방 소도시가 이렇다). 심지어 색상, 설치방식, 사이즈, 추가 구성품 등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한 상품이다보니 다른 제품에 비해 몇 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8. 전자레인지는 에어프라이어 기능까지 포함된 제품으로 해드렸다. 더불어 로봇청소기도 사드렸다. 혹시나 이미 샀을까 싶어 슬쩍 물어봤을 때도 부모님은 “청소는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지”라고 답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번 집은 그동안 살았던 집들에 비해 상당히 넓다. 그리고 부모님은 예전에 비해 덜 부지런할 필요도 있다. 로봇청소기를 안 써봤으니 모르는 것이다.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9. 물론 커튼과 전자레인지와 로봇청소기가 어디 자랑할 만큼 대단한 효도는 아니다. ‘이제 업데이트는 자식의 몫’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잘 하는 것도 많다. 리모델링만 해도 벽과 기둥 빼고 일일이 골라가며 바꿨는데 내 눈에도 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자영업’으로 30년 가계를 꾸려오셨다.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앞으로 하게 되겠지.
   
   
10. 한때는 부모님이 온전히 나를 키웠다. 앞으로는 내가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더 많을 테다. 지금은 그 중간 단계다. 어느 쪽도 일방적이지 않다. 온전한 성인으로서 그러나 가장 가까운 관계로서 아낌없이 주고 받는다. 가족끼리 각자 삶에 관심은 갖되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최근 고쳐먹었다. 언제 얼마나 어떻게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오는 참견이야말로 바람직한 가족애 아닐까.
    
    
11. 여담이지만 부모님이 이사 간 아파트는 올해 초만 해도 입지가 최악이었다. 공업단지와 논밭뿐인 곳에 뜬금없이 우뚝 서 있는 두 동짜리 아파트였다. 바로 뒤엔 작지 않은 강이 흘렀다. 그런데 해당 지역의 번화가 두 곳(시청 등이 밀집된 도심과 외곽에 조성된 혁신도시)을 잇는 큰 길이 아파트 바로 옆으로 난 것이다. 여전히 주변 인프라는 전무하지만 차로 10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
    
    
12. 재밌는 건 이후 집값은 뛰지 않고 그냥 매물만 사라졌다고 한다. 이사 갈까 했던 사람이 그냥 눌러 앉은 것. 적어도 지방 소도시에서 집은 사는 것(buy)이 아니라 사는 곳(live)이 돼 가고 있다. 그나저나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적기에 샀냐고? 길을 내는 데 투입된 건설팀이 숙소로 쓰다가 공사를 마친 뒤 내놓았고 마침 그 타이밍에 이사 갈 집을 알아보다가 바로 계약했다고 한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13. 여담 하나 더. 그렇게 주문한 커튼이 배송됐는데 거실에 달 커튼의 세로 길이가 살짝 부족했다. 처음엔 무타공으로 창틀에 고정하는 브래킷을 쓰기로 계획하고 커튼 사이즈를 쟀는데, 중간에 천장에 나사를 박아넣는 브래킷으로 변경하면서 커튼 사이즈는 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틀 상단과 천장까지의 길이만큼 아래쪽이 살짝 뜨게 됐다. 역시 이런 건 상주하면서 계속 보고 다시 재가며 해야 돼.

우리는 항상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훈련받았어요. 그래서 팬들과 온라인으로 소통할 때도 제가 완벽한 답변을 준비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준비가 되었을 때만 소통했죠.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소녀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제가 자라오며 공감했던 음악처럼 앨범을 만들고 싶은 개인적인 욕구와 필요를 느꼈어요. 그런 음악을 만들기 위해선 아티스트가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감정, 경험, 그리고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어요.

- 루루 가르시아 나바로, K팝은 로제를 '완벽한 소녀'로 만들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다움을 찾으려 한다(뉴욕타임스)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신나게 그러모았습니다.

• 241118-241201

그동안 다 읽은 책은 없고요.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먼저 크리스 밀러의 <칩워>입니다. 목차와 서문만 읽고 가볍게 수다 떠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 목차와 서문만 읽고 그대로 덮어두기에는 상당히 재밌습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전세계를 무대로 짧지 않은 타임라인 위에서 다양한 인물, 기업, 국가가 등장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하나 더 장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곧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더 감도 높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무엇보다 이를 흡입력 있게 풀어내는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는 반도체 업계에 대한 이해 수준이 매우 평범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쭉쭉 읽힙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입니다. 이 책은 두 달 뒤에 있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해진 분량을 조금씩 읽어나가는데요. 그 주에 읽었던 장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공유하고 간단히 이유를 덧붙이는 과제(?)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 제가 공유한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 미래주의자들의 권력은 다른 이의 막대한 고통을 포함해 특정한 것들을 보려 하지 않는 데서도 나온다. 유럽의 상업과 산업, 그리고 물론 유럽 중심적인 의미에서 교역 확대의 비전을 가지고 있던 레셉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총독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잘 구워삶을 필요가 있었지만, 뒤로 밀려나거나 필요하다면 강제 동원되기도 할 이집트 민중이 겪을 일은 그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비전은 그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진보' 개념에 잘 부합했다.(...)"

쿠팡이나 배달의민족을 비롯해 소위 혁신을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스타트업들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이집트 민중만큼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겠으나 이들 기업 또한 입점 판매자 또는 배달기사와의 관계에서 지속해서 사회적 문제를 빚어내고 있으니까요.

혁신을 이뤄낸 기업 혹은 기업가 - 사회적 문제의 원인 제공자로서의 기업 혹은 기업가는 분명히 같은 주체인데 서로 다른 별개의 주체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의문스러웠습니다. 그 기업 혹은 기업가를 그렇게 대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분위기가 좋았던 몇 년 전 스타트업씬에서 일하며 참 많은 ‘비전’을 접했습니다.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저 스스로도 가슴이 뛰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진심으로 일하기도 했고요. 그때 저는 어디까지 계산에 넣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장지향의 <최소한의 중동 수업>을 72%까지 읽었습니다. 이해 안 되는 것들은 슬쩍슬쩍 넘겨가면서 읽다보니 어느새 큰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입니다. 물론 아직 각 국가를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상세하게 파악하진 못합니다. 그래도 중동 이슈를 다룬 뉴스를 보거나 다른 책 혹은 아티클에서 관련 내용이 나왔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폭이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넓어졌습니다. 다음에는 유럽을 개괄하는 책도 한 권 살펴보면 어떨까 싶어요.

방금 언급한 ‘다른 책에서 관련 내용이 나왔을 때’에 해당하는 게 바로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입니다. <최소한의 중동수업>이 현대 중동 정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면 이 책은 거기에 영향을 미친 세계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전반적인 서술에서 세 종교에 친화적인 태도가 읽혀서 기초 사실을 균형감 있게 전달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충분히 검증된 저자인 것 같긴 한데…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일단 계속 읽어봅니다.

파올로 휴이트의 <게팅 하이>는 정말 가끔씩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이 레터를 보내는 날(24/11/30) 기준으로 어제와 그제 오아시스 내한 공연의 티켓팅이 있었나 봅니다. 인스타에 성공 혹은 실패 인증 행렬이 이어지고 있네요. 여튼 저번 레터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오아시스 노래나 계속 추천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Champagne Supernova입니다. 스펠링을 제대로 쓰기 위해 ‘참파그네 슈퍼노바’라고 외웠던 곡인데요. (다 아시겠지만) 샴페인 슈퍼노바라고 읽습니다. 중간 쯤 나오는 기타 솔로가 압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