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니, 요 몇 개월은 그저 허우적거리느라 바빴다. 집중할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했다.
   
   
2.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나도 모르는 새 사라지는 시간이 단 1초도 없었단 말야? 내가 살아온 11615일이 정말로 11615일이었다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그 반의 반의 반의 반의…반도 안되는데. 하지만 천천히 차곡차곡 정직하게 쌓이는 시간의 무게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은 단순히 흘려보내는 일조차 버거운 것이 됐다.
   
   
3. 그런 와중에 일상 생활은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라는 게 기막힌 아이러니였다. 풍족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고 있고, 각기 다른 인간관계는 잡음 없이 매끄럽게 유지되고 있으며, 군살이 좀 붙긴 했지만 충분히 건강했다. 매일매일 꼬박꼬박 8시간씩 잠도 잘 잤다.
   
   
4. 애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미래가 명확하지 않으니 과거에 해오던 걸 현재에도 계속 하는 데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고. 끝내야 할 것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그 끝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는 데서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 같다고. 고작 나 같은 애가 책임지기에 내 삶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인 관계였던 것이다. 알겠다. 끝내야 할 것을 끝내지 못하면 병이 난다. 그러니 끝내야 할 것을 끝내야 했다.
   
   
5. 풀칠도 그 중 하나다. 주 1회 보내는 에세이레터를 4년 반 이어왔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했고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정작 본업은 그동안 몇 번씩 바뀌었다. 비유하자면 스마트폰은 주기적으로 교체하면서 충전기는 늘 쓰던 걸 써왔던 셈이다. 어느 날 문득 이제 그 충전기도 바꿔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계속 쓰고 있는 이유가 단지 ‘계속 써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끝내야 할 것을 끝내야 했다. 풀칠을 그만두겠다고 마음 먹은 건 그러한 결심을 하기 전의 일이지만 사실상 풀칠이 스타트를 끊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6. 어제는 시작할 것에 대해 생각했다. 큰 목표는 정해졌다. 몇 년 뒤에는 제주도로 터전을 옮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예전에 공부하다가 덮어놓은 중국어 교재를 다시 꺼냈고 언젠가부터 앱 푸시 보내기를 포기한 스픽 앱을 다시 켰다.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언어가 큰 힘이 돼 줄 것이다. 에어비앤비 주식을 팔고 받은 돈으로 지식 커뮤니티 시에라 소사이어티 올인원 시즌권을 샀다. 안 살아본 삶을 준비하는 데에 다양한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지적 자극은 풍부한 소스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더, 더, 더.
   
   
7. 물론 시작할 것들이 끝낸 것들에 비해 항상 낫지는 않을 테다. 심지어 앞으로의 삶에 그다지 도움되지 않을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다만 끝낼 것을 끝내고 시작할 것을 시작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내가 지나온 경로를 환기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채비를 하는 데에 여러 단초들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연말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어쩐지 계절감 떨어지는 일이지만, 그보다 많은 걸 끝내고 난 다음일 테니 아무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조금씩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기 훨씬 이전에 빼앗은 것이 있다. 바로 놀이다. 하이트 교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현실 세계에서 지나치게 과잉보호한다”고 진단한다. 정글짐이나 뺑뺑이처럼 스릴 넘치는 기구가 사라진 놀이터, 열두어살 전에는 보호자 없이 어디도 가지 못하는 현실이 그 증거다. 모험할 수 없는 놀이, 어른에 의해 조직된 놀이는 진짜 놀이가 아니다. 재미가 있기도 어렵다. 그 와중에 스마트폰이 그것도 별다른 제약 없이 주어졌으니, 중독과 우울증, 자해나 자살은 정해진 미래였던 셈이다.

- 정선언, 스마트폰이 문제? 놀이부터 허하라(중앙일보)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신나게 그러모았습니다.

• 241104-241117

그새 다 읽은 책이 있습니다.

샹뱌오의 <경계를 넘는 공동체>입니다.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고 꽤 집중해서 읽었음에도 완독하는 데 두 달이 좀 넘게 걸렸네요. 결론부의 흡입력이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꽌시(관계)’라고 하는 중국인-중국사회 특유의 사고를 풀어주는 단락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흔히 누군가를 파악할 때 그의 ‘배경’을 살핀다고 하는데요. 저자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background로서 ‘개인의 과거 경력’을 의미하지만, 중국어로 번역하면 ‘꽌시’로서 ‘그가 현재 갖고 있는 다양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는데요.

“영어의 background는 ‘다차원적 시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과거를 이해해야 현재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어의 ‘배경’은 ‘다차원적 위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와 상호작용할 때,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은 단순한 한 명의 개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잠재적 참가자도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은 개인을 그 자체로 완결돼 명확한 경계를 가진 존재로 보지 않고 구체적인 관계와 맥락에 연결된 존재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적어도 겉으로는) 부정부패로 비치는 ‘우리가 남이가’식 언행이 그들 세계관에서는 숨쉬듯 당연한 것이죠.

…여러분에게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한 것이 아니라서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읽어보세요’라고 권하기에는 책의 난이도가 좀 높은 편입니다. 일반적인 사회과학서와 달리 에세이에 가까운 서술 방식(다만 결론부는 저자가 직접적으로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파트이므로 ‘일반적인 사회과학서’처럼 쓰였습니다) 덕분에 진도를 빼는 것 자체는 어려움이 크지 않았으나 저 또한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반의 반도 소화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예 포기하고 쭉쭉 넘긴 단락도 있고요. 그래도 중국에 관심이 있고 독서 경험치를 쌓고 싶은 분이라면 아주 긴 호흡으로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네요.

그리고 김경곤의 <경제의 질문들>을 다 읽었습니다. 제가 경제 문외한이거든요. 물론 살다보면 경험으로 얻게 되는 지식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서른 넘어서 했습니다. 책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경제 개념을 다룹니다. 상당히 친절하게 풀어주죠. 각자 놓여 있는 환경이나 갖고 있는 관심사에 따라 심화 학습을 해야 하는 영역이 경제에도 아주 많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이 내용들은 그 시작점이 확실하죠. 그만큼 기초적입니다. 아무리 문외한인 저라도 알고 있는 것들이죠. 문제는 그거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다시 기초지식을 다룬 책이나 영상을 찾는다는 점. 하지만 <경제의 질문들>을 덮은 직후에는 이제 심화학습으로 나아가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타이밍이 마침 맞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상쾌한 기분이 드네요. 앞으로도 경제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아처>는 출근길과 퇴근길 지하철에서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구성은 단출합니다. 위대한 명궁 ‘진’이 ‘소년’에게 궁도, 그러니까 활을 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분량도 148쪽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삽화가 포함돼 있는데도요. 대신 그 내용 하나하나가 은유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활쏘기는 누군가에겐 회사 생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인간 관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직접 언급되기도 하죠.

“궁술이 제빵사나 농부 같은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들은 관찰한 모든 것을 자신의 일에 적용할 것이다. 너도 그래야 한다. 훌륭한 제빵사에게서 손을 잘 쓰는 법과 재료를 적확히 배합하는 법을 배워라. 농부에게서는 인내하고 땀흘려 일하며 계절에 순응하고 폭풍우 앞에 불평불만을 쏟아내지 않는 태도를 배워라. 폭풍우를 탓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다음은 아직 읽고 있는 책입니다.

파올로 휴이트의 <게팅 하이>입니다. 종이책을 펼치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네요. 집에서도 노트북을 붙잡고 있다보니 전자책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조금씩 읽어가고 있으니 마칠 때까지는 오아시스 노래나 추천해드릴까 합니다. 오늘의 추천 곡은 2집 수록곡 She's Electric. 최근에 컴백한 지드래곤의 솔로 1집 수록곡 Butterfly이 표절했다고 떠들썩했었던 곡이죠. 그래서 어떻게 결론 났더라? 여튼 두 곡을 모두 잘 들었는데요. 지금까지 듣는 곡은 She’s Electric입니다. 흥얼거리기 딱 좋아요.

장지향의 <최소한의 중동 수업>을 60% 읽었습니다. 교과서 읽는 느낌으로 쭉쭉 읽어가는 중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중동 이슈. 조금씩 풀어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결정된 책입니다. 마침 <최소한의 중동 수업>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세트처럼 느껴지는데요. 아직 세 종교 각각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이라서 이렇다 저렇다 전할 말은 없네요. 하하. 수메르 문명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