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시간도 안 맞고 고장도 잘 나고 비싸고 쓸모 없는 물건 아니냐. 왜 비싼 물건을 소개하며 위화감을 조성하느냐’ 이런 힐난의 논리는 ‘인간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 왜 아직도 육상 경기를 하느냐. 왜 육상을 소개해 보통 사람들의 운동 능력과 위화감을 조성하느냐’와 같다. 질문을 조금 바꾸면 훨씬 생산적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왜 비효율적인 기계식 시계 기술이 아직까지 고가 취미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 박찬용, 현실 별 관심없던 저커버그는 왜 손목시계에 빠져든 걸까(조선일보)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신나게 그러모았습니다. 아참, 지난 주부터는 2주 단위로 페이지를 팠습니다. 읽기에서 책 비중을 높이고 디지털 콘텐츠 비중을 줄이니 자연스레 스크랩하는 문장들이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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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를 다 읽었습니다. 지난번 레터에서 “왜 제목이 언어의 ‘무게’일까 하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 결말에 이르면 알게 될까요?”라고 썼는데요. 결국 저는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이해한대로 다시 적은 문장입니다.

1. 남의 이야기를 번역하던 주인공은 소설 끝머리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삶을 기록하는 언어에 대해 느끼는 무게감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제목이 아닐까 하는 의견입니다.
2. 머릿속 종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은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 자체가 언어에 매몰돼 그 무게감에 짓눌려 살아가던 주인공이 해방된 상황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1번은 어설프게 떠올리기라도 한 생각이지만 2번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생각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이래서 독서모임 하는구나 싶습니다. 어느 회사 캐치 프레이즈처럼 혼자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고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게 됐네요. 책을 골라주신 Y님과 훌륭한 의견을 주신 H님께 고맙다는 말씀 올립니다.

마이클 루이스의 <고잉 인피니트>도 다 읽었습니다. 암호화폐와 거래소 관련된 기술 및 금융 용어를 비롯해 구조나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면 훨씬 재밌게 느껴질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다수는 아닐 테죠(저를 포함해서). 물론 그런 거 몰라도 충분히 몰입할 만한 책입니다. 저자의 또 다른 책인 <빅 쇼트>는 영화로만 접했는데요. 그 책 또한 <고잉 인피니트>와 비슷한 독서경험을 줄 것 같고, <고잉 인피니트>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빅 쇼트>와 비슷한 관람경험을 줄 것 같네요. FTX를 파산시킨 샘 뱅크먼프리드와 그 동료들이 벌인 일의 전말이 드러나는 결말 부분이 압권입니다. 이토록 허무한 끝맺음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임팩트를 남기죠. 게다가 따끈따끈한 실화라니.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과 <책, 이게 뭐라고>를 다 읽었습니다. 2년 반 정도 텀을 두고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요(<책, 이게 뭐라고>가 먼저 출간). 두 권이 마치 시리즈인 것처럼 읽힙니다.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에서는 <책, 이게 뭐라고>를 몇 번 언급합니다.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내용은 <책, 이게 뭐라고>에서 다뤘으니 여기서는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라는 식이죠. 그래서 곧바로 <책, 이게 뭐라고>를 읽었는데,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읽기와 쓰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층위를 오가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데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작가가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진행하면서 제작진과 함께 했던 온라인 독서모임입니다. 구글 스프레드 시트를 활용했으며 그렇게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팟캐스트 대본 방향을 잡았다고 하는데요. 특정 행위를 하는 데 적합한 도구를 발명해내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작가의 아내(종종 HJ로 등장)가 운영하는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의 프로토타입이 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요. 그게 흥미로워서 그믐의 모임 하나를 골라 참여 중입니다. 마침 장강명 작가의 책을 읽는 모임이더라고요.

다음은 아직 읽고 있는 책입니다.

샹뱌오의 <경계를 넘는 공동체>를 68% 지점까지 읽었습니다. 대단한 저작임은 분명합니다만 제반 지식이 전무한 상태나 다름없어 그 가치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에 담긴 통찰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으나 이것을 잘 읽어낸 분들의 서평 또는 후기를 통해 부분적으로 소화해나가며 얻는 쾌감도 쏠쏠합니다. 이러한 저술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파올로 휴이트의 <게팅 하이>는 가끔씩 저녁에 집에 혼자 있고 따로 할 일이 없을 때 다큐멘터리 끊어서 보듯 읽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있어 훌륭한 아티스트이자 최악의 파트너인 동시에 애증으로 얼룩진 형제인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의 오묘한 관계가 잘 묘사돼 있습니다. 오아시스를 대표하는 곡과 앨범과 공연의 비하인드도 자세히 담겼고요(책이 담아낸 시기가 오아시스의 최전성기였으니까요).

장지향의 <최소한의 중동 수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출퇴근 시간에만 읽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스마트폰에는 밀리의서재 앱을 다운로드 해놓지 않았는데요. 이북리더기는 침대에서만 쓰고 최근 뉴스레터 구독을 줄이다보니 스마트폰으로 읽을거리가 마땅찮더라고요. 그래서 ‘단권으로 구매한(=밀리에 없는)’ 전자책은 이 시간에 읽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책은 (아직 초반이지만) 사실 조금 실망스럽게 읽었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최소한’이라는 표현이 무색했거든요(온라인서점 리뷰에도 이런 평이 많네요). 중동 이슈는 그 자체로 접근성이 낮은 분야인데 너무 전문적인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기서 ‘전문적’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요구되는 데다 책에서 전달하는 정보량도 적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해 10월 이후 나름대로 중동 이슈에 관심 갖고 뉴스를 봐온 덕분에 그나마 따라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정도 수준에서는 쭉쭉 읽어나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어떤 주장을 논증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 정보 전달에 가까운 단락도 읽는 데 공을 꽤 들여야 합니다. 입문서라고 생각하고 덤비면 곤란합니다.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다면 효용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제가 지금 그러고 있습니다).